훌륭하다 훌륭하다 소련방 놈들 머리 하나

신에게 빌어봐라, 빵이 나오나 물이 나오나!

 (전략) 그때 내가 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북한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북한의 선전 잡지의 러시아어 판들이었다. 오늘의 한국 독자가 못 믿을 가능성이 많지만, 1980년대의 많은 소련 중산층 가정들이 북한 선전 잡지들을 정기 구독했다. 친북파라서 그랬던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중략) 돈을 들여서 구독하는 목적은 그 잡지의 내용을 보면서 실컷 웃으려는 것이었다. 많은 소련 가정에는, 북한의 선전 잡지가 폭소의 바다를 자아낼 만한 효능을 가진 유머 자원이었다. 내가 직접 목격했던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북한 잡지를 특별히 좋아하는 팬들이 잡지를 들고 가족과 손님 앞에서 스탈린 시대의 아나운서를 흉내내는 어투와 묵직한 목소리로 소리를 높여 낭독하기를 시작하곤 했다. 몇 줄을 낭독하다가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의 품에서 안식을 되찾은 여자 동무는...... 같은 문구가 나올 때는 모두가 파안대소하곤 했다. 이미 성의 문제에 꽤 예민해졌던 1980년대 소련 사회에서는 그러한 문구가 잡지의 편집인들이 의도했던 바와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잡지의 문구들 중에서 팬들이 일종의 폭소 유발용으로 늘 외우고 다니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나와 잘 알고 지냈던 한 친구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외우면서 기분 조절을 하곤 했다.

 먼 산에서 적병에게 손실을 입히는 의병이 살고 있다.
 적병이 잡지 못하는 그 의병에게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다.
그 문구를 외울 때마다 친구의 시무룩한 얼굴이 늘 소안(笑顔)으로 변하곤 했다.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02> P256~P257에서

 과연, 개그 선진국은 다르다. 개그를 즐기기 위해서라면 변방 제후국의 선전 잡지까지 구독하다니. 하긴, 개그 선진국이 수입하는 개그가 3류 개그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 동안 소련인들끼리만 이 좋은 걸 즐겼다니 질투심이 끓어오를 정도다.
 뭐 요즘은 유튜브에 들어가면 검색 한번에 기분 전환용으로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를 감상할 수 있고, 심지어는 2차 창작물(트랜스포머 버전 <메가트론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도 나오는 마당이지만. 탈냉전과 세계화는 이래서 좋다.



덧글

  • nishi 2009/09/06 14:16 # 답글

    지금 보면 개그지만.... 사실 상고시대부터 근세까지 계속 저런 방법은 인류역사와
    함께 해오지 않았습니;;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14:20 #

    그래서 박노자 교수도, 소련 시민들이 '위대하신 수령님'과 같은 표현을 읽으면서 웃어댔지만, 그것이 스탈린 시대 소련 프로파간다의 직역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자국의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고, 북한을 놀렸던 행위 자체가 북한에 대한 멸시와, (북한이 모델로 한)스탈린 시대가 지나갔음에 대한 안도와 만족의 감정이 든 비열한 행위라고 비판했지요.

    뭐 저야 웃자고 하는 겁니다만.
  • Curtis 2009/09/06 14:29 # 답글

    고품격 개그를 즐길 줄 아는군요. 역시 개그 선진국!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15:05 #

    수입은 명품™만
  • 언럭키즈 2009/09/06 15:39 # 답글

    러시아는 정말 개그의 보고로군요.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21:06 #

    웬만한 개그에는 질려서 북한 개그까지 수입을.....
  • 自重自愛 2009/09/06 16:20 # 답글

    <아웃사이더> 7호(2002)에 먼저 실렸던 글이군요.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21:08 #

    호오, 그렇군요. 이 글이 실린 <당신들의 대한민국 02>는 2006년에 나왔는데 이외로 일찍 나왔다니, 흥미롭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웃사이더가 취향에 맞으셨는지.....?)
  • 自重自愛 2009/09/06 21:14 #

    1. <아웃사이더>는 그때까지만 해도 꽤 취향에 맞는 편이었습니다. 박노자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비호감이었지만. -_-

    2. 2002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안티조선 내에서도 민주당 지지자들과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화목하게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 (선거가 여러 사람 베려놓았지요. -_-;;;;)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22:58 #

    아, 진중권과 강준만의 그 서울시장 논쟁...... (뒷골)
  • 카군 2009/09/06 20:24 # 답글

    자기네들이야 진지하게 만들어 뿌린거니 프로파간다 먹혀든다고 좋아하겠지만, 정작 구독하는 소련 인민들 본인들은 Mad나 National Lampoon지 구독하는 마인드로 본 셈이군요. 크하하.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21:09 #

    현실로 튀어나온 부조리 개그 아니겠습니까. 우왕ㅋ굳ㅋ
  • 소시민 2009/09/06 21:47 # 답글

    그래서 박노자 교수는 어차피 북한의 그것은 웃음거리로 전락할거니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것 같더군요.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6 22:57 #

    저는 아직까지는 한국 보수세력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국보법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지만요.
  • 길 잃은 어린양 2009/09/07 01:12 # 삭제 답글

    이건 정말 고상한 취향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07 22:39 #

    뭐 박노자 교수는 '북한에 대한 비하와 우월감 폭발'이라고 생각해 꺼림칙해하는 모양입니다만. 요즘 케이블 방송을 보다보면 확실히 고상한 취향 같습니다.
  • 비르투 2009/09/10 01:24 # 답글

    개그를 수입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스스로 개그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뛰어나고...정말 훌륭하군요!!ㅋㅋㅋ
  • 오그드루 자하드 2009/09/12 00:21 #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개그 제조 능력이 사라졌을까 우려됩니다.
  • 천지화랑 2009/11/04 11:35 # 답글

    개그센스 부족하다고 타박받는데 러시아어나 배워야겠습니다. ㅋ.
  • 오그드루 자하드 2009/11/08 14:23 #

    오오 개그의 언어 오오오
  • 르네 2012/05/08 14:41 # 삭제 답글

    음... 정말로 이해가 안되서 여쭙는 말입니다. 맨 아랫쪽 적병 의병 부분의 웃음포인트(?)는 어디인가요?
    역시 개그 선진국의 개그는 이핼ㄹ 하려고 해도 아는게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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